“아무래도 이상합니다.” 바이닐이 의구심을 잔뜩 담아 내뱉은 말이 선교의 온도를 뚝 떨어트렸다. 존 버르가 실종된 이후 전에 없이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던 선원들에게는 그리 달갑지 않은 말이었다. 자기 자리에 반쯤 파묻혀 있던 루트는 느릿하게 몸을 일으켜 세웠다. “이상하다니, 뭐가요?” 스페이드호는 예정된 일정에 따라 예정된 항로를 순항했다. 사라진 존 버...
“이제 그만! 소란은 그만하면 됐어요. 우리가 여기 모인 이유를 상기하세요.” 상석에 앉은 루트가 테이블을 양손바닥으로 두들겼다. 각자 않은 자리에서 수군거리던 선원들이 입을 다물었다. 기관장과 당직자를 제외한 사관들은 회의실에 모여 있었다. 스페이드호가 출항한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좌중이 진정되자 루트가 주먹으로 입가를 가리며 큼큼, 목소리를 다듬었...
“이게 나오길 기다렸지!” 교하의 턴. 교하가 새로 뽑은 카드를 필드에 내려놓았다. 계량기가 한계를 넘어선 기계장치에서 희뿌연 김이 올라오는 일러스트. 필드 위에 있는 모든 메카 몬스터의 공격력이 두 배가 되는 강력한 마법 카드 【오버히트】다. 교하의 메카 덱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핵심 카드이기도 하다. “전부 공격!” 필드에 나와 있는 교하의 메카 몬스터...
곧게 뻗은 도로를 따라 전기 차가 달렸다. 똑같이 생긴 집들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늘어서 있는 주택가였다. 차 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내렸다. 남자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소리가 몸을 움직였다. 남자는 아무것도 모른 채 진입로를 걸었다. 남자가 문을 여는 순간 소리가 그 어깨를 거칠게 잡아챘다. “안녕하세요 기준 씨.” 기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소리는 기준...
안녕하세요. 언젠가 사라져 버릴 것들의 기록, 미씽아카이브입니다. 다가오는 8월 14일은 미씽아카이브 운영자이자 작가, 그리고 이 글을 쓰고 있는 당사자인 저 송한별의 생일입니다. 작년인 2020년 생일에는 많은 분들이 생일을 축하하며 책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사실 아직도 다 읽지 못했지만, 덕분에 한 해 동안 즐겁고도 충만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
“내 턴, 드로!” 수지가 덱에서 카드 한 장을 집어 손으로 가져갔다. 이제 손에 쥔 패는 여섯 장. 수지는 그중 한 장을 뽑아 필드에 내려놓았다. 【에메랄드 드래곤】. 특별한 능력은 없지만 그 레벨 대에서는 가장 공격력이 높은 몬스터 중 하나다. 수지는 그대로 【에메랄드 드래곤】을 진격시켰다. 수지의 손가락이 내 카드를 가리켰다. “어택!” 나는 뒷면 수...
“으왓 씨, 뭐야!” 갑자기 비가 와서 나도 모르게 성질을 냈어. 가방으로 머리를 가리려다가 생각을 바꿔서 정장 재킷을 뒤집어썼지. 꽤 큰 마음을 먹고 지른 가방이었거든. 사회 초년생용 싸구려 면접 정장보다는 두 배쯤 비싼 거였어. 둘 중 하나를 적셔야만 한다면 가방보다는 재킷이 낫지. “갑자기 무슨 비야, 미쳤나?” 서울까지 가서 면접을 봤지만 빛과 같은...
쥐가 난 것처럼 다리가 저렸다. 뒷다리를 파드득 떨자 간질간질하던 관절이 조금은 나아졌다. 그 바람에 몸에 쌓인 먼지가 날렸다. 귀찮은 것들을 밀어내고자 날개를 펄럭였더니 묵은 먼지가 눈보라처럼 몰아쳤다. 이래서야 더 이상은 뻗댈 수가 없다. 용이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오랜 잠에서 깨어날 때가 되었다. 용은 둥지를 튼 산의 정상에 올라앉아 세상을 내려다보...
따듯함, 안심, 견고함. 그를 생각하면 수많은 심상이 떠오른다. 그는 경이(驚異)다. 그는 이 우주의 유일한 생존자이자 누적되어 온 모든 지식을 보존하는 관리인이다. 또한 나를 만들어 낸 창조주다. 그는 내가 충분히 준비되었다고 생각했을 때 의식을 불어넣었다. 그는 성장과 노화가 불필요한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것들을 내 생에서 배제했다. 나는 가장...
모든 일이 끝난 다음에야 문득 깨닫게 되는 순간이 있다. 위장에 구멍이 났다는 소리를 들은 다음에야 매일 불닭볶음면을 끓여 먹은 게 문제였다는 것을 깨닫는 것처럼 말이다. 위장은 서서히 망가지며 신호를 보냈을 텐데도 사람은 구멍이 뚫린 다음에나 문제를 파악한다. 돌이킬 수 없는 큰일이 되기 전에는 문제라는 것조차 모른다. 불닭볶음면이 기숙사 룸메이트의 위장...
어둡고 싸늘한 공간이었다. 유니폼을 갖춰 입은 직원이 트레이를 꺼내 물건을 보여 줬다. 현진은 트레이를 덮은 흰 천을 걷었다. 머리를 바짝 자른 젊은 남자의 알몸이 보였다. 천을 더 걷자 뭉개지고 터진 하반신이 드러났다. “대형 트레일러에 깔렸대요.” 시체 안치소 직원이 말했다. 시체를 원형에 가깝게 맞춰 놓으려 한 것 같지만 살덩이는 산산이 조각나 있었다...
“제기랄, 거지 같으니라고.”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욕이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머리를 뒤덮은 풀페이스 헬멧 내부에서 독기 어린 목소리가 울렸다. 숨을 쉴 때마다 습기 찬 쉰내가 진동했다. 전투복에 내장된 공기 정화 필터는 수명을 다한 지 오래였다. 창영이 낯선 행성에 홀로 떨어진 지 열여섯 시간 이상 지났다는 뜻이다. “머저리 같은 놈들. 똥통에 머리통...
독립 장르 소설 생산자, 미씽아카이브. 404.error.missing@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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